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아편전쟁 (문단 편집) === 아편전쟁 === > '''"역사를 회고하면 아편은 단지 전쟁에 직결되는 원인이지 근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출처 이매뉴얼 C.Y.쉬 저 조윤수·서정희 역, 『근-현대 중국사 상권 : 제국의 영광과 해체』(서울: 까치글방, 2013), p. 242.]"''' >---- >서중약(徐中約, 이매뉴얼 C.Y.쉬) 1840년 5월 말까지, [[인도양]] 각지의 [[영국 해군]]이 [[싱가포르]]로 모이고, 6월 15일에 [[광저우]] 앞바다에 도착했다. [[파일:주산 열도 중국.jpg]] [[저우산]]을 점령하는 영국군 [[영국 해군]] 소장 조지 엘리엇[* 찰스 엘리엇의 친척으로 그 사촌동생이라는 이야기와 형이라는 이야기가 혼재한다.]이 통솔하는 [[영국]]의 동방 원정군은 대포 540문을 탑재한 군함 16척, 증기 군함 4척, 운수함 27척, 병력 운수함 1척과 인도 주둔군 4,000명으로 구성됐다. 영국군 주력군이 광저우에 즉시 도착했지만 [[임칙서]]의 철저한 대비[* 병력 10,000명과 병선 60척, 서양 대포 300문을 확보하고, 11개의 포대를 만들고, 쇠사슬로 주강 하구를 막아 버렸으며, 민병대를 소집했고 서양인에게 상금을 걸어 내통자를 차단했다.]로 [[영국군]]은 광저우를 공격할 엄두[* 지상포대에 존재하는 포대는 바다에서 공격하는 전함보다 높이 등 여러 조건에서 상당히 유리했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함대가 모조리 박살날 운명이니 그대로 도주.]를 내지 못한 대신 4척을 남기고, 북상해서 [[샤먼시|아모이]]를 포격하고, 7월 5일에 주산 열도의 정해(현 [[저장성]] [[저우산시]] [[https://ko.wikipedia.org/wiki/%EB%94%A9%ED%95%98%EC%9D%B4%EA%B5%AC|딩하이구]])를 점령하고[* 정해 총병 장조발은 전사, 정해 지현(사또) [[https://zh.wikipedia.org/wiki/%E5%A7%9A%E6%80%80%E7%A5%A5|요회상]]은 자결했다. 원래는 물과 식량만 요구했으나, 요회상이 거부해서 공격했다.], 8월 9일에 [[톈진]] 앞바다까지 접근하자 도광제는 임칙서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영국 측의 반발만을 환기했다고 오판해 임칙서를 크게 질책하였다.[* 임칙서의 노력을 과소평가한 안일한 평가였다. 개전 당시까지 광저우를 제외한 타 지역들은 낙후된 무기로 전쟁을 수행했다.] 게다가 8월 19일에 영국군이 마카오 통행 관문을 점령하고 해상봉쇄를 해서 청군은 외국에서 들여오는 군수물자 교역을 못하게 됐다. > "대외로 통상을 근절하게 했으나 근절하지는 못했고[* 이것은 [[영국인]]들이 [[미국]] 상인을 자처하면서 계속 무역했기 때문이었다. 북경에서는 아편 무역이 완전히 근절된 게 아니라고 파악했다.] 대내로는 범법자를 체포했으나 소탕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빈말로 어물어물 넘긴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수많은 파란을 야기했을 뿐이니 생각건대 금치 못할 만큼 참으로 분하고 답답하도다. 그대는 무슨 말로 짐에게 대답하겠는가? 이에 [[임칙서]]는 광둥의 관문 1개 세금 중 10%만 사용해도 외적을 격퇴할 수 있다고 답변했으나 이미 [[도광제]]는 임칙서를 향한 신임을 완전히 철회해 허튼 소리라고 강하게 비판한 일변, 영국은 임칙서를 비난하고 아편의 배상과 억울함을 벗겨 달라고 요청했기에 그 사람들의 요청을 들어주면 곧바로 돌아가리라고 오판한 것이다. 즉, 청 조정은 톈진의 군함을 군사 시위가 아니라 하소연하고자 온 집단이라고 엄청난 큰 착각을 한 것이다. 결국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를 파면한 후 베이징으로 소환하고 직예총독(直隷總督) 기선(만주어: ᠪᠣᡵᠵᡳᡤᡳᡨ ᡴᡳᡧᠠᠨ, 보르지기트 키샨 / 중국어: 博爾濟吉特 琦善, 박이제길특 기선)[* 몽골인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도 종군했다.]에게 서양에서 온 [[대영제국|야만인 오랑캐]]들을 잘 다독여서, 조공품과 은을 주어서 자신들이 살던 섬나라에 돌아갈 차비로 넉넉히 주어서 돌려보내라고 하명하였다. 직예총독이었던 기선은 북경을 방어할 책임이 있었기에 영국군을 다독이면서 영국군의 태도에 맞춰 주자 협상을 체결할 희망을 품은 영국군이 톈진에서 퇴각하자, 도광제는 고무되어 10월 29일, 기선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840년 12월이 끝나갈 무렵 영국군이 [[홍콩]]의 할양과 자신들이 판매했던 아편의 배상금을 요구하자, 그제야 기선은 자신이 보통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는 귀항길 여비로 쓰라고 줄 은을 그냥 배상금으로 주면 되고, 애초에 배상금이야 [[송나라]] 시기부터 이미 지불한 전례가 있지만 영토 할양은 전통 시각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무려 4000년이란 역사상 국토를 확장시켜 영토를 넓혔고, [[조선]]이나 [[베트남]], [[태국]], [[티베트]], [[몽골]], [[위구르]], [[류큐왕국]] 등 조공국으로 지배는 해봤지만, 영토를 준 전례가 없었다. 즉 이민족에게 영토를 빼앗긴 적은 많아도 스스로 떼어준 적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효성 문제라기보다는 ''' 지금도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강력히 주장하는 모토이자, 국권의 상징, 나아가 중국사 수천년의 아이덴티티인 "[[중화사상]]" 그 자체에 타격을 주는 매우 큰 문제였다.''' 결국 기선은 영토 할양에 대해 반대하자 결렬되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산 열도의 전염병으로 사상자가 생기는 영국도 그렇게 강경한 자세를 고수할 수는 없었다. 영국의 중국 원정 전쟁 동안 전투로 인한 전사자는 대영제국의 우월한 기술력에 힘입어 1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지 엘리엇의 후임을 포함한 500여 명이 전염병으로 병사했다. 다시 말해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시간이 흘러 1841년 1월 7일, 2차 천비 해전이 벌어져 다시 전쟁이 시작 됐다. 철갑증기선 [[https://en.wikipedia.org/wiki/Nemesis_(1839)|네메시스 호]]가 청나라군이 쏜 구식 포탄을 간지럽다는 듯이 튕겨내며 여유롭게 임칙서가 만들어놓은 포대들을 상대하고, 나머지 배들이 [[콩그리브 로켓]]으로 청군을 상대해 청군은 정크선 15척 중 11척 완파, 500여 명이 전사, 호문진(현 [[https://ko.wikipedia.org/wiki/%EB%91%A5%EA%B4%80%EC%8B%9C|둥관시]] 후먼진) 포대가 함락됐지만, 영국군은 단 한명의 전사자도 없이 그저 38명만 부상당했다. 이로 결렬된 협상이 다시 열리고, 1841년 1월 27일에 찰스 엘리엇[* 조지 엘리엇은 전 해 11월에 건강 문제로 귀국했다.]과 기선 간의 천비 가조약(川鼻 假條約)이 체결됐다. || [[파일:attachment/아편전쟁/Exasdfsdfasdfe.jpg|width=400]] || || 천비 가조약(川鼻 假條約) || || 1. 청에서 불법으로 몰수한 아편을 순은 600만 냥으로 배상한다.--너희 경찰 단속반이 압수한 불법제조해서 판 우리 마약 전부 배상해라.-- 1. 청의 중요 핵심 항구 5곳을 전부 개항하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정해를 돌려받는다. 단, 세금은 모두 그대로 청 정부에 귀속한다. 1. 차후 영국 시민은 청 황제와 맞먹는 동등한 지위를 약속한다. 1. 광둥 지역에서의 무역을 전쟁 이전으로 복구한다. 모든 복구비용은 청나라에 귀속한다. || 그러나 결과상 양국은 이 조약의 인준을 거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한 분쟁으로 인식한 청이 영토를 할양한다는 사실은 있을 수도 없을 뿐더러 평등한 관계를 넘어서 영국 왕실과 귀족 뿐만이 아니라, 일개 영국의 평민까지도 중국 황제와 맞먹는 동등한 지위는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영국도 원정군의 예산에도 미치지 않는 겨우 은 600만 냥 금액으로 전쟁을 종결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다가 기선도 '[[임칙서]]의 과오를 시정할 권한'만 있었지 외국과 조약하거나 영토를 할양할 권한도 없었기에 이를 알게되어 격노한 황제에 의해 가산 4,000만 냥[* 몽골 왕공의 후예로 만주족에 편입된 보르지기트 명문가의 금수저 중 금수저였다.]을 몰수당하고 [[흑룡강]]으로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으며, 청나라 황제가 대영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결국엔 양국 간 무력 대결만이 남게 되었다. 2월 19일에 전투 재개에 따라 청군 총사령관으로는 정역장군(靖逆將軍) [[https://zh.wikipedia.org/wiki/%E5%A5%95%E5%B1%B1|혁산]][* [[강희제]]의 황14자이자 [[옹정제]]의 동복 아우였으나 황권다툼으로 사이가 틀어져 핍박받았던 순근군왕 윤제의 후손으로, 도광제에게는 조카뻘이었다.]이 임명되었으나 정작 혁산은 전투를 회피하고 만사를 부사령관인 참찬대신(參贊大臣)이자 호남제독(湖南提督) [[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8%8A%B3_(%E6%B8%85%E6%9C%9D%E5%B0%86%E9%A2%86)|양방]]에게 의병 40,000명을 주며 일임하였다. 양방은 백련교도의 봉기와 신장 지역의 [[이슬람]] 봉기군을[* 위구르인 장게르가 일으킨 반란인데 장게르는 위구르인 1만으로 신장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신장의 4개 도시를 함락하며 신장 남부를 휩쓸 정도로 기세가 강했다. 특히 청나라에서 보낸 진압군 20,000명까지 역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청은 36,000명의 병력을 다시 투입해서야 겨우 진압할수 있었다. 이때 청나라는 소비한 돈이 1,000만냥이었고 동원된 말이 20,000마리 낙타가 10,000마리였다. 하지만 정작 반란의 주범인 장게르는 그가 해외로 도주하는 바람에 잡는데 실패한다.] 진압한 장수였으나[* 양방은 이 반란들을 진압한 공으로 종1품 관직에 과용후(果勇候)의 작위를 얻고, 자금성 안에서 말을 타는 것을 허락받는다.] 문제는 그가 대외 관계에서는 무지했고 지휘하는 의병들조차 훈련을 받지못해 기강이 문란한 부랑배와 아편중독자들로 구성된 오합지졸들이었다. 게다가 미신을 신봉한 양방은 영국군의 대포가 청군보다 뛰어나고 정확한 이유가 요술 때문이라는 미신을 그대로 믿은 채 요술을 파훼할 수 있다는 대변과 여자의 오줌 등[* 사실 중국의 고전소설들을 보면 이렇게 오물로 요술을 파훼하는 장면들이 꽤나 나온다. 특히 [[수호전]]만 해도 [[이규]]가 [[나진인]]에게 도술로 혼이 나면서 감옥으로 떨어졌을때 간수들이 이규를 요괴라며 그에게 오물을 가져와서 부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알고보면 중국의 유서 깊은 미신.]을 성벽에 바르는 행위를 방책이랍시고 내놓았으며, 베이징에서는 양인(羊人)을 잡는 데는 호랑이가 제격이라면서 선발한, 호랑이 년·월·일·시에 태어난 사람들을 지휘관들로 뽑아서 영국군과 싸우도록 했다. 당연히 크게 패하였는데, '''막상 자금성에는 전투 전에 미리 작성한 승리 보고서가 도착했고 자금성 황실과 조정은 그 거짓 보고서를 보고 한시름 놓았다고 한다.''' || [[파일:attachment/아편전쟁/xample.jpg|width=400]] || || 진강을 공격하는 영국군 || 1841년 8월, 영국군 10,000명은 청 동남부를 완전히 초토화하고 양쯔강으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매우 빠르게 진입했고, 입구 [[닝보]](寧波)를 지키는 장수 여보운(余步云)은 칼 한번 쥐어보지도 않고 도망을 가고 말았다. 그 후 영국군은 닥치는 대로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면서 양쯔강에 진입하였으며, 1842년 3월에 혁산이 이끄는 정규군 12,000명과 민병대 33,000명의 4만 5천 대군이 불과 6천여 명의 영국군에게 격파당하고 지휘관 혁경[* 건륭제의 황11자 성철친왕 영성의 손자.]은 단기필마로 겨우 도망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6월에는 [[상하이]]가 함락되고 7월에는 영국군은 청의 제2 도시인 [[난징]](南京)을 지키는 요충지이자 대운하(경항대운하)의 핵심 기지인 [[전장시]] (鎭江)를 공격하였다. 영국군 7,000명에 맞서 전장을 수비하는 청군 4,000명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영국군 공병대가 성문을 폭파시키면서 전장이 함락되어 전세가 기울었고, 수비병 전원이 전사했으며, 지휘관 해령(海齡)은 자결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인 민중을 불신해 협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 36명이 전사해 제1차 아편전쟁 중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전투가 되었다. 1841년 9월에는 영국 수송선 너버다(Nerbudda)가 홍콩에서 물자를 싣고 중국 북부로 향해 가다가 타이완 남부에서 좌초해서 영국인 선원들이 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842년 3월에는 역시 범선 앤(Ann)이 타이완 남부에 좌초해서 선원들이 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현지 지휘관은 이를 도광제에게 보고했는데, 1842년 3월 저장성의 닝보 전투에서 영국군이 전사자 없이 부상자만 5명이 생기는 동안, 청군이 500명 넘게 죽는 대패를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도광제는 보복으로 너바다와 앤의 포로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한다. 1842년 8월 10일, 포로 192명이 참수형으로 처형되었고 87명은 이후 학대 등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때 포로들은 간부 선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도 식민지인들이었는데, 영국 측은 1인당 100달러의 몸값을 주며 석방을 요구했으나 그때는 이미 포로들이 처형된 뒤였다. 그래서 이 일은 영국 정부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아편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난 후 진상 조사가 벌어졌는데 도광제가 직접 처형을 명령하였음에도 현지 군 지휘관과 행정관의 책임을 물으며 둘을 각각 신장과 쓰촨으로 좌천시키는데에서 처벌을 마무리시켰는데 그 둘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복귀하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